4학년 4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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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이이에 대하여(4-4최동현)

이름 최동현 등록일 18.05.07 조회수 23

이이(, 1536-1584, 중종31-선조17)는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정치가로서, 자는 숙헌()이고 호는 율곡(: 집안의 농장이 있는 경기도 파주 파평면 율곡리의 이름을 딴 것)이며, 관향은 풍덕군 덕수현()이다. 이원수()와 평산 신씨( )의 4남 3녀 중 3남으로 외가인 강릉에서 태어났다. 이이의 집안은 요절했던 조부를 제외하면, 대대로 관직에 나갔다.

아버지 원수는 사헌부 감찰(정6품)을 지냈으며, 증조할아버지 이의석()은 홍산() 현감(종6품)을 지냈다. 또 아버지 원수의 당숙(즉, 이이의 재종조부)인 이기(, 1476-1552), 이행(, 1478-1534), 이미(, 1484-?) 형제는 당대의 실권자였다. 이 때문에 이이는 자신의 가문을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어 온 집안’()으로, 스스로는 ‘세신’()으로 자처하고 있었다. 또, 이이는 파주, 강릉, 해주 등에 연고를 두고 자주 옮겨 살았지만, 스스로는 한양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한편 이이의 집안은 뒤에 동서 당쟁의 원인을 제공하게 되는 심의겸의 집안과도 연고가 있었다. 심의겸(, 1535-1587)의 할아버지는 심연원(, 1491-1558)이었고, 심연원에게는 심봉원(, 1497- 1574), 심통원(, 1499-?)의 두 아우가 있었는데, 이 중 심봉원은 이이의 할머니인 남양 홍 씨의 종모제()였다. 이 인연으로 이이는 어려서부터 심봉원의 집을 드나들면서 심씨 집안사람들과 사귀었다. 이이는 심봉원의 서재에 부친 「우송당기」()를 지어 주기도 했고, 그가 죽자 그의 묘지명을 짓기도 했다. 또, 심의겸의 아버지 심강(, 1514-1567)의 제문을 짓기도 했다.

이이는 동서의 당쟁이 문제 된 이후까지도 심의겸과 친교를 유지했는데, 이 때문에 이이는 동인들에 의해 심의겸을 편드는 사람으로 공격받기도 했다. 이이와 심의겸의 관계를 비난한 인물 중 한 사람인 송응개의 상소에 의하면, 이이가 생원시에 합격하고도 예전에 승려 생활을 했었다는 이유로 성균관의 공자 사당에 참배할 수 없게 되자, 심통원이 주선하여 무마한 적이 있으며, 과거 급제 후에는 심의겸의 천거로 청요직에 발탁되었다고 한다.

이이의 생애는, 그의 사상 형성과 관련해서 대략 성장기(1536-1554), 수련기(1555-1564), 모색기(1565-1571), 정립기(1572-1584)의 네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 시기 성장기는 이이가 19세에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되기까지의 시기이다. 이이는 어려서는 외가인 강릉에서 지냈으며 6세가 되어서야 어머니를 따라 한양으로 왔다. 이후 그는 한양과 파주를 오가며 살게 된다. 그는 13세 때에 진사 초시에 합격함으로써 일찌감치 신동으로 불렸다. 그러나 16세에 어머니의 죽음을 당하여 큰 충격을 받은 데다, 뒤이어 아버지가 맞은 서모 때문에 가정의 불화가 잦자, 어머니의 상을 치른 후 결국 금강산에 입산하여 승려가 된다. 비록 승려로 지낸 기간은 1년 정도에 불과했지만, 이 일은 평생 그를 괴롭히는 이력으로 따라다닌다.

한편 19세를 전후해 이이는 성혼(), 송익필(), 정철() 등 나중에 그의 학문적 정치적 동료가 되는 이들과 사귀게 된다. 이 중 성혼은 이이 집안의 농장이 있는 파주에 살고 있었다. 정철은 성혼과 친구였던 연고로 이이와 교제하게 된다. 송익필과 이이가 친교를 맺게 된 데에는 이지함()의 형인 이지번()의 역할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산 이씨 집안과 이이 집안은 세교()가 있었는데, 이지번이 고양의 구봉() 아래 살고 있었으므로 이이는 자주 이곳을 방문했으며, 이 때 역시 같은 곳에 살던 송익필과 알게 된 것 같다.

이들이 살았던 곳은 현재의 행정 구역상으로는 파주의 심악산() 구봉 부근 산남리()에 해당한다. 이지함은 이이, 성혼, 송익필을 ‘우리 당()’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시기에 이이는 주로 문장 수련에 열심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아직 사상적으로 주목할 만한 부분은 드러나지 않는다.

둘째 시기 수련기는 20세부터 29세에 과거에 급제하기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는 이이가 관직 진출을 준비하던 때이다. 절에서 나온 후에 이이는 20세인 1555년에 「자경문()」을 지어, 승려가 되었던 일을 반성하고 다시 과거 공부에 전념하여 벼슬길에 나아갈 것을 결심한다. 그래서 21세와 22세에는 한성시에서 연달아 장원이 되었고, 24세에는 「천도책()」으로 별시 초시에서 장원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대과에서는 낙방하였고, 26세에는 아버지의 상을 당하기까지 한다. 삼년상을 마친 뒤 1564년에 마침내 이이는 7월에는 생원과 진사에, 8월에는 명경과에 급제하여 호조좌랑을 제수 받는다.

이 시기에 특기할 일은 이황()과의 만남이다. 이이는 22세 되던 1557년 9월에 성주 목사 노경린()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듬해 그는 장인의 임지인 성주에서 강릉 외가로 가는 도중, 예안 도산에 들러 당시 58세였던 이황을 방문하고 이틀 동안 강론하였다. 이 만남 이후 이이는 이황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이황의 철학적 견지를 직접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특히 1558년에 이이는 이황과 두 차례 편지를 교환한다. 편지에서는 학문적 토론 외에도, 이이가 승려였던 사실을 반성하자 이황이 그를 격려하기도 하고, 이이가 과거에 낙방한 것을 이황이 위로하기도 한다. 이후에도 그들은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는데, 그 중 사상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이가 35세 때인 1570년의 서신 교환이다.

이 시기 이이의 사상을 짐작하게 하는 자료는, 「천도책」, 「성책」() 등의 글이 그러하듯, 주로 과거 답안의 형태로 작성된 것이다. 이 글들은 대부분 『율곡전서』의 「습유」에 수록되어 있다. 이것들은 시험 답안이라는 특성상 서로 모순되는 진술을 하는 경우도 많다. 또, 나중에는 이이의 상징처럼 된 경장론에 반대하는 글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 글들로 미루어 볼 때, 이 시기 이이는 이기론에서는 대체로 ‘기일분수’()의 견해를, 수양론에서는 거경 궁리의 견해를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37세 이후에 정립한 사상과는 크게 다른 점으로서, 이 시기 이이는 신유학에 대해서 아직까지 개략적인 이해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시기 모색기는 30세에서 36세 되는 해까지로, 이 시기는 이이가 청년 관료로 활약하면서, 사상적으로는 그가 나아갈 길을 찾던 때이다. 이이는 1565년에는 예조좌랑과 사간원 정언, 1566년에는 이조좌랑, 1568년에는 사헌부 지평, 홍문관 부교리, 1569년에는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1570년 10월에 관직을 그만 둔 뒤 이후 처가가 있는 해주와 파주를 오가며 지냈다. 이때부터 1572년 여름에 성혼과 서신으로 문답할 때까지 실제로 이이가 관직에 있었던 것은, 청주 목사로 있던 9개월 정도였다. 이이는 이 때 어느 정도 시간적인 여유를 얻어 철학적 탐구에 몰두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확립하게 된 듯하다. 이이는 1571년에도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기를 거듭하다가 6월에 청주 목사로 부임하였으며, 그는 여기서 「서원향약(西)」을 지었다.

이 시기에 이이가 남긴 저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34세인 1569년 9월에 임금에게 올린 「동호문답()」이다. 모두 11조로 된 이 저술에서, 이이는 “간특한 자를 물리치고 현명한 사람을 진출시키는 일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오직 옛날의 폐단을 없애고 새로운 혜택을 베풀어 민생을 구하기 위해서이다.”고 하여, 관료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제도의 개선에 두면서 경장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경세론에서는 이 시기에 이미 이이 철학의 특색이 어느 정도 나타나고 있었다.

이에 반해 형이상학에서는 여전히 자신의 견해를 세우지 못한 상태였다. 가령 그가 37세 이후에는 이황의 근본 견지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고 철저하게 비판한 “본성이 발하여 정이 되고, 마음이 발하여 의식이 된다.”(, )는 호병문()의 명제에 동의하는가 하면, 미발에 대한 경의 수양을 강조하기도 한다. 즉, 이 시기에 이이는 경세론에서는 제도 개선의 견지를 분명히 하면서도, 심성론과 수양론에서는 이황의 주장에 어정쩡하게 끌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또, 이는 기일분수에 기울었던 수련기와도 구분되는 점이다.

넷째 시기 정립기는 이이가 37세에 성혼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비로소 자신의 철학을 정립한 이후부터 49세로 죽기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 이이는 철학자로서, 정치가로서 눈부신 활약을 보인다. 37세인 1572년에 이이는 일시 사직하고 파주로 돌아갔다. 그는 여기서 성혼과 이기, 사단칠정, 인심도심에 대해 왕복 서신으로 토론하면서, ‘기발이승’(), ‘이통기국’(), ‘심시기’(), ‘성심정의일로’() 등 이기론과 심성론 상의 핵심 명제를 제시한다. 한편, 같은 해 7월에 영의정을 지낸 이준경()은 죽기 직전에 선조에게 유차()를 올려서, “붕당()의 사론()을 깨뜨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인순왕후의 동생으로서 당시 서서히 권력의 핵심에 진입하고 있던 심의겸이 붕당을 형성할 조짐이 있음을 지적한 것이었다. 이 차자가 파문을 일으키면서 선조가 동조하는 태도를 보이자, 이이는 이준경을 반박하는 「논붕당소()」를 올려 심의겸을 옹호함으로써, 뒤에 본격적인 동서 당쟁 과정에서 그가 수행할 역할을 예고했다.

즉, 이이는 37세 되던 선조 5년 1572년에 철학적으로, 또한 정치적으로 자신의 견지를 명확히 확립하고 밝힌 것이다. 이후 이이의 생애는 이 때 수립한 자신의 견지에 근거하여 이를 실행하고 확장해 가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1572년은 이이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따라서 이때를 기준으로 하여 이이의 생애를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도 있겠다.)

이이는 1573년에 홍문관 직제학, 동부승지가 되었고 1574년 우부승지가 되었으며, 이 때 1월에 왕명에 따라 「만언봉사()」를 올렸다. 이는 이이의 경세론을 집약한 것이며, 동시에 성혼과의 문답에서 확립한 이기론과 심성론을 기초로 궁리(), 거경(), 역행()의 3조목을 근간으로 하는 수양론 체계를 제시한 저술이다. 이이는 계속해서 병조 참지, 사간원 대사간, 황해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1575년, 이이가 40세 되던 이 해는 이이의 생애에서 한 정점이었다. 명종 말 선조 초에 걸쳐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인순왕후 심씨가 1월에 죽었다. 이것은 심의겸의 권력 기반이 일시에 허물어졌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외척인 심의겸을 축출하려는 동인과, 심의겸의 편에서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서인의 대립이 점차 본격화되었다.

서인의 견지에서는 바야흐로 위기를 맞게 된 이 상황에서 당시 외직인 황해도 관찰사로 있던 이이는, 2월에 상소하여 임금에게 너무 애통해 하지 말 것을 청했다. 다시 3월에는 ‘병으로’ 체직하여 파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홍문관 부제학을 제수 받고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이이는 4월에 들어가 사은하고 또 사직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그는 ‘마지못하여’ 취직했다.

이 때 이이의 이 같은 거취에 대해 선비들 사이에 논란이 일자, 이이는 “임금이 애통해 하는 때에 착한 마음이 나타나는 것이 옛날과 다른 까닭”에 다시 벼슬에 나아갔노라고 변명했다. 5월에 박순 등이 서경덕에게 증직하도록 청하자, 이이는 이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던 선조를 “서경덕은 다른 이와 달리 스스로 깨달은 묘리가 많다.”고 설득하여, 우의정을 증직토록 했다. 이는 초기 서인의 한 축을 이루고 있던 박순, 민순, 남언경, 박민헌 등 서경덕 제자들의 뜻을 수용함으로써, 전체 서인의 결집을 다지는 의미를 지닌다.

동인과 서인의 대립은 우연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이 해 8월에 밖으로 표면화된다. 재령군에서 종이 주인을 죽인 사건이 있었는데, 좌의정 박순이 위관이 되었다. 이 사건의 처리를 놓고 대사간 허엽, 사간 김효원() 등이 서인의 영수인 박순을 추고하도록 청했는데, 양사에서 오직 사헌부 대사헌 김계휘와 정언 조원만이 대신을 추궁토록 한 것이 잘못이라고 했다. 이이는 김계휘 등의 주장에 동의하여, 김계휘, 조원을 제외한 양사의 관원이 모두 체직해야 한다고 했으나, 결국 허엽, 김계휘 등이 모두 물러나고 조원만 출사하게 되었다.

이후 김계휘는 평안감사로, 이후백()은 함경감사로 나갔으며, 유희춘은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이 사건 이후 이이는 당시 동인의 젊은 지도자인 김효원에 주목하게 되었고, “그 기세를 꺾어 놓지 않으면 반드시 폐단이 있으리라 여겨져서, 그의 기세가 성할 때에 기세를 꺾는 계획을 쓸” 생각을 하게 된다.

10월에 이이는 우의정 노수신, 대사간 정지연() 등을 움직여, 심의겸에게는 개성유수를, 김효원에게는 부령부사를 제수하여 이들을 외직으로 나가도록 만들었다.(이 때 김효원의 임지가 너무 외진 곳이라는 여론이 일자, 김효원은 다시 삼척부사로 나가게 되었다.) 이후 김효원을 지지하던 이성중, 정희적, 노준 등이 외직으로 밀려남으로써, 오히려 당쟁은 더욱 거세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다음 해 이이가 벼슬에서 물러나 한 동안 칩거하는 원인이 되었다.

한편으로 이이는 이 해에 학문적으로도 정력적인 활동을 펼쳤으며, 특히 자신의 철학적 견지를 경연 등을 통해 선조에게 알리는 데에 힘썼다. 이이는 이 해 9월에 신유학적 제왕학이랄 수 있는 『성학집요()』를 편찬해 선조에게 올렸다. 10월 24일에는 『대학연의』를 진강하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수양론의 핵심인 ‘극기복례’()의 뜻을 논했다. 11월 28일에는 야대()하여 천리()와 인욕()에 대해 논하여 선조의 동의를 얻기도 했다. 다시 12월에는 박순과 서신으로 태허()에 관한 논변을 벌였다. 이 논변은 이이가 학문적으로 상당 부분 빚지고 있던 서경덕의 이론에 대한 청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해 말에 이이는 병으로 체직되고 호군()에 제수되었다.

1576년 2월에 이이는 파주로 돌아왔다. 이는 심의겸과 김효원을 외직으로 내보낸 일 때문에 이이가 안팎으로 비난을 받으면서, 정치적인 주도권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박순이 이이의 은퇴를 허락하지 말라고 선조에게 청하자, 선조는 “가의는 글을 읽어 말만 잘할 뿐 쓸 만한 인재가 아니었다. 한문제가 그를 쓰지 않은 것은 본 것이 있었던 것이다.”고 냉랭하게 말했다 한다.

이때부터 1580년 12월에 다시 관직에 복귀하기까지 이이는 주로 파주와 해주를 오가며 지냈다. 그러나 그가 완전히 정치 활동을 중단한 것은 아니었다. 이 기간에 그는 동인과 서인의 강경론자였던 이발과 정철에게, 그리고 심의겸에 비판적이었던 성혼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며 이들을 설득하려 애썼다. 또 기회 있을 때마다 상소하여 자신의 붕당론을 선조에게 알리기도 했다.

이 당시에 이이가 취한 붕당론은 양시양비론에 근거한 동서 화합론이었다. 즉, 김효원과 심의겸, 동인과 서인이 모두 옳은 점도 있고 그른 점도 있으며, 심의겸과 김효원의 옳고 그름을 가리는 다툼은 국가의 운영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으므로, 이들을 조정하여 화합토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 이이가 동서 화합을 주장하자, 어떤 사람이 이이에게 “천하에 어찌 둘 다 옳고 둘 다 그른 법이 있겠는가?”고 말했다. 이이는 “무왕과 백이 숙제는 둘 다 옳고 춘추의 전쟁은 둘 다 그른 것이다.”고 대답했다. 이 같은 주장은 실제적으로는 외척의 국정 간여를 배제하자는 동인의 주장에 직면하여, 상대적으로 명분에서 밀리는 서인의 견지를 옹호하려는 것이었다.

관직에서 물러나 있는 5년 동안 이이는 주로 교육과 교화 사업에 힘썼다. 이이는 1577년 12월에 『격몽요결()』을 완성하였고, 「해주향약()」 「해주일향약속()」 「사창계약속()」 등을 의논하여 지었다. 1578년에는 해주 석담()에 은병정사()를 지어 제자를 양성하였다. 또, 주자사()를 정사 북쪽에 세우고 조광조와 이황을 배향하려 계획하기도 했다. 1579년에는 『소학집주()』를 완성했다.

1580년 12월 이이는 마침내 대사간을 제수 받아 정치 일선에 복귀한다. 1581년 이이는 대사헌, 호조판서 등을 지냈고, 공안 개정 등 제도 개선을 주관할 경제사()를 설치할 것을 청했으며, 명종 20년(1565)부터 선조 14년(1581)까지의 일을 기록한 『경연일기』(3책)를 완성했다. 1582년에는 이조판서, 형조판서, 의정부 우참찬, 우찬성,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고, 「인심도심도설」, 「학교모범()」, 「극기복례설」 등을 지었으며, 「만언소」를 올렸다.

1583년 이이는 마침내 동인과 정치적인 결전을 벌이게 된다. 이이는 4월에 「진시사소()」를 올려, 동인들은 대부분 ‘오직 동인이냐 서인이냐’를 가리는 데에만 힘쓰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공론을 수립함으로써 동서간의 시비를 명확히 밝힐 것을 주장한다. 이는 그가 이전의 양시양비론에서 벗어나, 당쟁에 공격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곧 동인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6월에 이이는 동인이 주축이 된 삼사의 탄핵을 받자, 물러나기를 청하고 파주로 돌아갔다.

이 탄핵의 주된 내용은, 병조판서였던 이이가 왕의 사전 승인 없이 군마를 올리라는 명령을 내려 권력을 멋대로 휘둘렀으며, 왕이 부르는데도 오지 않아 왕을 업신여겼다는 것이다. 7월에 이 탄핵에 대해 성혼이 삼사의 잘못을 들어 상소하였고, 태학생 유공진 등 460여 명이 상소를 올려 변론하였다. 8월에 왕은 특명으로 이이를 비난한 송응개, 허봉, 박근원을 귀양 보냈다. 이이는 9월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이는 그의 생에 마지막이 된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다.

그러나 이이는 다음 해 1584년 1월 16일에 49세의 나이로 서울 대사동()에서 병으로 죽었다. 경기도 파주시 천현면 동문리의 자운산 기슭에 장사 지냈으며, 이 묘소 밑에 1615년에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이 중심이 되어 자운서원을 설립하였다. 1623년에 ‘문성’()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1682년(숙종 8)에 문묘에 배향되었다가 숙종 대의 정치적인 격변 속에서 1689년에 철향되었다가 1694년에 복향 되었다.

이이는 미발 중심의 성격이 짙은 이황의 철학을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 그것과 정반대되는 이발 중심의 철학적 전통인 지각설에 이르게 된다. 이이는 지각설에 근거하여 이일분수(), 이선기후(), 성즉리(), 심통성정(), 거경궁리() 등 주자학의 핵심적인 명제를 부정하고, 대신 기발이승(), 이통기국(), 심시기(), 성심정의일로(), 거경궁리역행 등의 이론을 축으로 한 체계를 세운다.

이는 지각설의 전통과 주자학의 자산을 완전히 소화해 낸 뒤에 이이 자신의 독창적인 관점에서 재구성함으로써, 호상학 등 그 이전의 지각설 체계와 비교할 때 이론적 깊이와 폭에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철학 체계를 수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지각설의 신유학적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 종합적인 체계이다.

이 체계를 근간으로 하여 성립한 율곡학파는 이후 3백년간 지속되면서, 17세기에는 예송() 논쟁을 벌이고, 18세기에는 호락논변을 통해 지각론()과 미발론()의 문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하며, 다시 19세기에는 이항로 학파를 중심으로 명덕주리주기() 논쟁을 벌인다. 이이는 이후 조선유학사의 지형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생애 연보

1536년: 12월 26일 새벽에 강릉에서 태어남.

1554년: 금강산의 마하연이라는 절에서 승려가 되었다가 하산함.

1555년: ?자경문?()을 지음.

1558년: 경북 예안에서 이황을 만남.

1564년: 과거에 급제하여 호조좌랑에 임명됨.

1570년: "동호문답"()을 지음.

1575년: "성학집요"()을 지음. 동서의 당쟁이 시작됨.

1577년: "격몽요결"()을 지음.

1579년: "소학집주"()를 완성함.

1582년: ?인심도심도설?()을 지음.

1583년: 이조판서에 재임명됨.

1584년: 1월 16일 서울 대사동에서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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