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년 4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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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생님 : 김진경
  • 학생수 : 남 11명 / 여 12명

율곡이이에 대하여 ( 13번 이세인)

이름 이세인 등록일 18.05.03 조회수 124

13번 이세인

 이이 1536(중종31)~1584(선조17)

 

 자: 숙헌  호: 율곡. 석담. 우재  시호: 문성


16세기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유학자 이자 사상가 , 정치가인 율곡은  사헌부 감찰을 지낸 이원수가  아버지이고, 어머니는  5만원권 지폐에 나오는 신사임당이며 외가인 강릉에서 태어났다. 율곡 본인도 5천원권에 나오니 , 한집안에서 두명이나 대한민국의 지폐에 나오는 대단한 집안이다.

밤나무 골짜기라는 뜻인 율곡의 호는,그가 자란 마을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4세에  중국의 역사책인 '사략"을 배웠고, 8세에 시를 지었으며,13세에 지금의 공무원 시험과 비슷하나,실제로 관직에 나가지는 않는, 진사초시에서 장원을 한다.  16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유학이 국교였던 당시로썬 놀라운 일인 불교에 빠져 한때 금강산에 들어가 1년정도를 머물렀으나, 의외로 유학의 중요성을 한번 더 깨닫게 된다.

 " 뜻이 서 있지 않고는 원하는 생을 살수 없고,  어떤 일도 성공할수 없다" 는 주장을 한 이후, 그는 평생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율곡은  서울에 올라와  한성시에서 수석으로 합격하고,  평생 총 9번의 과거에 장원해 '구도장원공' 이라 불렸다.

 26세에 아버지를 잃고 , 29세에 호조좌랑에 임명되고, 그후 예조좌랑, 이조좌랑, 청주목사 , 대사헌, 형조판서 , 이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하며, 부교리와 춘추기사관을 겸임하면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기도 한다.

그가 쓴 책으로는 '성학집요' 격몽요결' 소학집수'  인심도심도설' 등이 있고, 백성은 먹는것을 하늘로 삼으니, 먹는것이 우선되고 나서야 교육도 가능하다"  며  "시무육조" 를  왕에게 바치며 민생의 평안을 주청하였다. 그리하여 율곡의 글이 뒷날 대동법 실시와 사회제도개혁의 사상적 토대가 된다. 또한 곧 큰 변란이 있을것임을 예측하여,  군대를 양성하여 도성에 2만 , 각도에 1만씩 배치해야 한다는 '10만 양병설' 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율곡을 시기한 반대파 대신들이  예산 마련등의 이유로 반대해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그리고 9년후 우려했던 임진왜란이 일어났지만 미처 대비를 하지 못한 조선은 큰 곤경에 빠지게 된다.

또한 우연히 퇴계 이황과 학문적인 소통을 하게 되는데,  이황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이치와 기운이란 두개의 축으로 움직인다는 '이기이원론'을  주장한것에 반해, 이치와 기운은 하나로 융합된다는 '이기일원론'을 내세웠다.

 그가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때, 그의 가족들에겐  머물만한  집한채도 없어서 그의 지인과 제자들이 도와 집을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이조판서라는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도 평생을 청렴결백하게 살았고,  자신이 세운 바른 뜻을 이루기위해, 노력했던 그의 많은 업적을 기리기위해 임금은 그에게 '문성' 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가  남긴 명언에는


" 물욕은 흔들리는 그릇속의 물이다. 흔들림이 그치기만 하면, 물은 차츰 맑아져서 처음과 같아진다"


" 뜻이 서지 않으면 만사가 성공하지 못한다"


" 뜻을 세우고 명확히 알며 독실하게 행하라"


" 시의라는 것은 때에 따라 변통하여 법을 만듦으로서 백성을 구하는 것이다"


" 천하의 모든 물건 중에는 내 몸 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다. 그런데 이몸은 부모가 주신 것이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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