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이이에 대하여(01번 권세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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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권세리 | 등록일 | 18.05.07 | 조회수 | 77 |
권세리(01번)
율곡이이 *호 율: 곡,석담,우재 *활동분야: 조선 중기의 학자·정치가 *주요저서: 성리설,성학집요,격몽요결 *출생년도: 1536년12월26일 *사망년도: 1584년1월16일
아명은 현룡, 자는 숙헌, 호는 율곡, 석담, 우재, 이름은 이(珥), 본관은 덕수이며, 시호는 문성이다. 아버지는 이원수로 찰방과 사헌부감찰을 지냈으며, 후에는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이다. 본관은 덕수(德水) 이씨(李氏)로서, 아버지 이원수 공과 어머니 신사임당 사이에 셋째 아들로 1536년(중종 31) 12월 26일에 외가(外家)인 강릉 오죽헌(烏竹軒)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율곡을 낳던 날 밤 꿈에 검은 용이 바다에서 침실로 날아와 아이를 안겨주는 것을 보았다고 하여 어릴 적 이름은 '현룡(見龍)'이라고 하였다. 세 살 때부터 말과 글을 배운 율곡은 어느 날 외할머니가 석류를 가리키며 "저게 무엇 같느냐?" 라고 묻자, "석류 껍질 속에 빨간 구슬이 부서져 있네(石榴皮과碎紅珠)"라고 대답하였다. 여섯 살에 어머니를 따라 서울(청진동)로 올라온 율곡은 따로 스승을 두지 않고 어머니에게서 기본적인 학문을 배우고 나머지는 독학하였다. 여덟 살 때는 본가인 파주에 들렀다가 화석정(花石亭)에 올라 가을의 정취를 '화석정'이란 아름다운 시로 표현하였으며, 열 살 때는 강릉 경포대에 들러 경포호수의 사계절을 표현한'경포대부'라는 긴 글을 지었는데 그 문학적 재능과 학문의 깊이에 사람들이 놀랐다.율곡이이는 어렸을때 아버지가 병상에 누워있을때 자신의 팔을찔러 피를입에넣어드려 아버지의병환을 났게했다 열 세 살 때는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시험관들에게 불러나가자 겸손하고 의젓한 모습으로 좋은 평판을 듣게 되었다. 열 여섯 살 때에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 장례하고 3년간 시묘살이를하였다. 시묘가 끝난 열 아홉 살에 율곡은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고 다음해 스무 살에 하산하여 다시 유학에 전념하였다. 이 때 자신의 스스로를 경계하는 '자경문(自警文)'을 지어 삶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스물 아홉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아홉 번 장원한 인물)'이라 일컬어졌다. 급제한 후 사가독서를 받았으며, 호조좌랑에 임명되었다. 예조좌랑, 정언, 이조좌랑, 지평등을 역임하였다.그 후 황해도 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학문에 몰두하다가 1581년 다시 대사헌예문관제학을 겸직하다가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양관(예문관과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다. 이듬해 이,형,병조판서와 우참찬을 역임했다.1583년병조판서가되어 여진족을 물리칠 왜적의침입에 대비 해 10만의군사를길러야한다는"10만양병설"를주장했으나 받아지지않았다 그리고 같은 해 판돈령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얻어 선조 17년(1584) 정원 16일 4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율곡이이의사상- 1.철학사상- 1) 이기론 2) 심성론 3) 학문의주체성과 독창성을 확립함 3) 교육목표(성인군자를기르는것)4)교육방법(귀납적교육방법채택-경,궁리,거경,역행) 5)교육과정 6)교육관련저서(격몽요결,학교모범,은병정사학규,문헌서원학규, 서원향약,해주향약,사창계약속) 2)국민통합과 안보의식의제고 3)국방 대책과 경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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